성탄절 아침.
모두들 성당에 가고 혼자 집에 남았다.
1년 중 하루 종교와 무관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날이다. 인류에게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주었던 분. 그러나 가끔 예수님이라는 거울에 나와 우리 사회를 비추어 보면 씁쓸한 마음이 생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보자.
사랑으로 세상이 덮여 있으면 좋으련만 하루하루 살기에 바쁘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권력자는 권력을 이용해서 더욱 혼탁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삶과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태초에 인간은 그런 것을 몰라고 알 필요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 삶과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종교가 발전해 왔다.
예수님은 인간의 탐욕에 이용당하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외치면서 돌아 다니는 노친네들을 보게 된다. 마치 좀비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 누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인간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 진다. 차라리 길바닥에 기어 다니며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다니는 개미가 더 낫겠다.
종교는 지금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테러와 전쟁, 학살 등등의 잔악한 행동은 모두 종교에 기반한 사태이다. 역사는 종교의 역사이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전쟁의 대부분은 종교의 이름으로 터졌다. 인간에게 제일 두려운 죽음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죽이고 헐뜯는다. 종교는 과격하다 못해 인류의 재앙 수준까지 되고야 말았다. 뉴스에서는 이슬람의 과격한 행태를 고발하고 있지만 기독교라고 무엇이 다른가!
구원이라는 개념이 있다. 종교의 목적이기도 한 이 개념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아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내가 아닌 것들이 나의 밖에 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나’에게서 오는가? 아니면 나의 밖에서 누가 나에게 주는가?
이 물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국 서로 싸우고 헐뜯고 질투하고 남을 미워하면서 시간이 지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얼마나 비참한가.
이 생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거든 이러한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발전의 첫발이 시작된다.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분들이 위에 있는 세상이 되었다. 소위 판사, 검사, 의사 등등 어려부터 시험을 잘치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의 능력은 무엇인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들이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군인들이 정치를 하던 때는 무식하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너무 머리가 좋아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잘 알고 있다. 그 분들이 법을 만들었고 그 법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그런데 그 분들이 만든 법에는 어디에서도 ‘사랑’에 대한 느낌이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지쳐서 더는 삶의 희망을 갖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만들어 가는 법을 만들고 있다. 마음 속에서 삶의 희망을 뺏어 버리는 그런 법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관공서에 사람이 필요해서 사람을 뽑는다. 학교라고 치자 그 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계약을 해야 된다. 쉽게 말해 1년 동안 같이 일하다가(사용해 보다가) 맘에 안들면 그만 두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합법적으로.
이게 법인가?
그럼 그 사람은 1년이 지나 또 그 곳에 일하기 위해서 결정을 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굽신거리면서 자존심을 버려야 된다. 이런 삶이 인간의 삶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삶을 연명해 가고 있는데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삶을 누릴 수 있냐는 말이다.
또 최근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되어 움직이고 있는 사실이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다. 마치 단군할아버지가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처럼. 그때는 그런 사회였으니 당연하다지만 지금은 그러한 시대가 아니다. 목사가 정치를 한다면 그게 목사인가? 예수님을 모욕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으면서 입에는 사랑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부끄럼이 없는 시간이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