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삶의 결과는 죽음이다.
구원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죽음이고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다.
모두 죽음을 의미하는 같은 뜻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한발짝씩 다가간다. 그러나 삶속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에 따라서 누구는 단순한 죽음되고, 누구에게는 구원이나 열반이 된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인가? 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살려 주는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다.

인류를 생각해보자. 나와 같은 머리를 갖고 있는 조상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했을 때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략 1,000억명의 인간이 태어났다 사라졌고 그중에 대략 70억 정도가 생존해서 지구 위에 붙어 있다.

그 중에 누가 구원을 얻었으며 열반을 얻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많은 천억의 사람중에 단 한사람도 그 사실을 모른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커다란 개념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철이 들어 어른이 된 후에 이 개념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내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아, 혹은 에고라고 하는 존재를 느끼는 순간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은 더욱 평온해진다는 것이다. 자아는 모습이 없지만 나의 몸둥이 속에 살아 있는 실체이다. 우리 눈으로 불은 볼 수 있지만 뜨거운 열기는 볼 수 없는 것처럼 자아라는 것은 내 속에 있는 하나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그리고 그 것이 나의 몸을 조종하고 있다.

구원이나 열반과 같은 개념은 자아가 살고자하는 욕망으로 지어냈을 뿐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글쓴이: 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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