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세상을 두고 떠난 그에게

아침에 출근해서 포털을 연다. 뉴스 를 보면서 세상 일을 둘러보기 위함이다. 그런데 포털에 들어 오면 어쩔 수 없이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검색어 순위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이 검색어 순위에 있고 또 그 사람이 나보다 연세가 더 있는 사람이라면 불안한 마음으로 클릭을 한다. 십중팔구 별세 소식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동진’이라는 이름이 검색어 순위 1위에 있다. 불안한 마음으로 클릭을 했는데 정말로 믿기지 않는 임종 소식이 뉴스로 올라와 있다. 불현듯 그의 음악이 머릿 속을 채우며 가슴 한켠에서는 슬픔이 밀려온다. 죽음이라니!

나는 이사람을 모른다. 그저 그의 음악을 예전에 들어 보았을 뿐이다. 슬플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켠이 저민다.

아마도 그의 음악에서 솟아나오는 에너지의 종류가 슬픔에서 비롯되어서 그럴 지도 모를일이다. 우리의 이성은 기쁨을 추구하지만 결국 우리는 암흑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어둠에서 나와 빛을 받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픔이 너무나 커서 삶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슬퍼야하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의 존재를 느껴야한다. 영혼이 있다면 그 곳까지 나의 슬픔을 보내야한다. 기쁨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애초에 슬프고 상처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96년 내가 스물 여섯살 때 삶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이 세상에 있는 나에게 눈 부신 세상을 알려 주었다. 이 노래를 들은 이후로 세상은 이제 ‘눈 부신 세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유다. 세상이 아름답고 눈부시기 때문이다.

눈부신 세상을 안겨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렇지만 우리도 당신에게 가기 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해하고 매미 소리 울리는 늦여름을 가슴 속에 담으며 묵묵히, 쓸쓸히 하루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