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서 잠을 잘 때까지 시시때때로 마음이 움직이면서 바위 같던 결심은 공기 속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변해버린다. 굳게 먹은 마음은 시간의 변화와 함께 바위에서 먼지가 된다. 연악한 나의 결심은 언제나 겨우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만다.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많은 변화가 생긴다. 매순간 결심을 해야 될 때도 있다.
부지런함이 몸에 베어 있는 사람이 있다. 부자런의 댓가는 여유있는 생활이 되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해야할 일들이 무척 많고 언제나 바빠 보인다. 부지런 때문에 덕을 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자가 될 확률이 높지만 부자가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는게 좋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머릿 속에 해야할 일의 목록이 남들보다 더욱 많으며 그에 따라 삶은 계속 된 결심을 요구하는 상태에 놓인다.
일이나 학업 때문에 결심을 하게 되면 십중팔구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부지런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꾸준히 그 것에 몰두 한다면 언젠가는 성공했다는 성취감에 머물 수 있다. 우리가 해야 될 결심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지만 무모한 결심이 있다. 중독을 끊겠다거나 잠을 줄이겠다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것은 매우 유익하지만 어떤 것은 나를 해치고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내가 무언가에 중독이 되었을 때 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결심이다. 보통 중독은 육신이 원하는 경우가 많다. 담배 중독이 정신적인 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엄밀히 따지면 뇌에서 니코틴이 들어 올 때가 되었다는 신호가 담배 중독이다. 이 신호를 무시하면 몸과 정신이 예민해지고 격해진다. 금연을 결심하고 한 두시간이 흐른 후부터 끊임 없이 그리고 은밀하게 마음은 속삭인다. 너무 피우고 싶다. 이번 딱 한개만 피우자. 담배를 핀다고 바로 죽는 것은 아니다. 등등의 갖은 속삭임은 결국 바위 같던 결심을 불과 몇 시간 만에 무력화 시키고 나를 점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은 이런 식의 결심을 다음날 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속삭임의 악마에게 여지 없이 깨지겠지만 무언가를 향해서 나아 가는 자신을 느끼며 더욱 굳건한 바위를 만들 수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삶이 주는 자유이다. 나는 그저 자유를 누릴 뿐이다. 성공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사실 삶은 그 자체로써 중독성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매일 그 중독성으로부터 벗어 나려고 노력한다. 본능적이기 때문에 나의 노력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부처님이 굳은 결심을 하고 어떤 나무 아래 앉았던 일, 아니면 예수님이 등에 십자가를 지고서 어떤 언덕을 올라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일들은 일반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중독으로부터 벗어 나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모두 다 죽으라는 말은 아니다. 중독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악마성이며 결심은 그 악마와 싸우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악마에게 잡히지 말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중독을 물리치기로 굳게 마음을 먹고 승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몸과 정신은 그에 따라서 빠르게 반응한다.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금연을 결심하고 흡연 욕구를 참고 있으면 몸은 불과 몇 시간 안에 몸 속의 니코틴을 밖으로 배출하고 입과 손가락에서 나던 역겨운 냄새는 사라진다. 정신은 맑아지고 또렷해지지만 여전히 중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 없는 악마의 유혹에 시달린다. 끝이 안보이는 악마와 싸우는 상태가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악마의 부대보다는 나의 부대가 더 강해지고 어느 순간 그들의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을 갖게 된다. 피땀 흐르는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대부분 항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결심과 그에 대한 시도가 필요하다.
작은 일을 결정하고 큰 일을 결심하면서 인생의 시간이 흐른다. 작은 결정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그런 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된다. 아주 작은 결정이라도 근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이 나의 몸이 원하는 일인가 아닌가는 매우 중요하다. 몸의 노예가 되어 그의 요구들을 들어 주다 보면 인생의 시간은 허망하게 지나 간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몸의 요구를 들어 줄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다. 음식을 나의 몸에 넣어 줌으로써 몸은 에너지를 얻고 활동할 수 있다. 그래서 음식은 몸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면 음식은 이제 나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서서히 음식에 중독이 되어 간다. 맛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시도 때도 없이 입으로 음식을 집어 넣는다. 이 쯤 되면 음식은 나에게 영양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행동에 대한 반감이 생긴다. 무언가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저지하려는 내면의 깊은 울림이다. 깊은 울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심에 대한 근원이 된다.
“오늘부터 음식을 적당히, 그리고 좋은 것들을 골라서 먹자. 건강을 챙기겠다!”
애초에 음식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불필요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어둠속에 들어서고 나서야 헤매이며 그 곳을 빠져 나오려 애를 쓴다. 욕심이야말로 우리를 망치는 기초이다.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가 나오려는 반복을 하면서 인생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이런 쳇바퀴에서 빠져 나와 홀로 유유히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결심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 인생에서 목표가 있다면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닐까. 욕망도 없고 결심할 필요도 없는 상태.
슬프게도 나의 굳은 결심만으로는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니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에 그녀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 했을 때 부드러운 미소보다는 따귀가 날라올 수 있다. 나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게 세상이다. 암환자가 투병하면서 나는 암을 낫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뜻데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 인생이 고통 속에 흐르는 것은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진행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울적한 마음이 나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 넣을 때 모른 척하는게 답이 될 수 있다. 암환자가 자신의 암에 빠지는 순간 진짜 환자가 된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암이라는 병을 머릿속에 넣고서는 입에 들어 가는 것 움직이는 것 하는 일 모두 암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다. 죽음이 다가왔다면 그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 교통사고처럼 어처구니 없이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도 많은데 암이라는 병은 최소한 나에게 몇 달이라도 시간을 준다. 그리고 유방암이나 갑상선암처럼 가벼운 암들은 10년 이상 살 확률이 90% 이상이다. 이 쯤 되면 이름만 암이고 병이 아닌 것이다.
악마에게 점령 당했던 생활 방식은 여러 가지 몸 상태로 나타나며 현대병이라는 것들은 모두 그 범주에 있다. 암,당뇨,고혈압 등등이다. 간혹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런 병이 생긴다면 그것은 유전이다. 즉 부모와 그 부모들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이 된 후에 이런 병이 생긴다면 대부분은 나의 내면 속에 있는 악마와 타협한 댓가가 지병이 된 것이다. 따라서 좋은 결심은 나를 건강으로 이끌 수 있다. “돈을 벌려고 투잡을 뛰겠다.” 이런 결심이 아니라면 그렇다. 본능에 충실한 결심,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서 생기는 결심은 나의 삶을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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